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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5)남한산성 매당왕신 도당굿
이름 이주영 작성일 2003-09-29
1. 유래와 현황

남한산성은 삼국초기부터 주변에는 토성(土城) 및 석성(石城)을 구축하고 적의 침입에 방비를 했던 군사적 요충지이다. 산성 안에는 조선조 영조(英祖), 정조(正祖), 혜종(惠宗) 때를 기해 인구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기록에 의하면 1759년(영조 35년)에 성내 남동에 614호에 2,246명이 살았고, 성내 북동에 462호에 1,862명이 거주를 했다고 기록을 하고 있어서 당시 성안에만 1,076호에 4,108명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광주군의 총 인구는 11,713명으로서 남한산성은 광주군 전체의 30%가 넘는 인구밀집지역으로 볼 수가 있겠다. 1789년 정조13년에는 성안에 1,044호에 3,631명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1836년 혜종 2년의 인구는 남한지(南漢誌)에 의거하여 1,117호에 4,353명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렇게 광주군내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던 남한산성은 많은 종교적인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중 가장 오래도록 전승이 되어 온 것이 남한산성 도당굿이다. 남한산성 성내에는 시조 온조왕묘(溫祖王廟)와 성황당(城隍堂), 여단(礪壇)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남한산성을 축조하다가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처형을 당한 이회장군(李晦將軍)과 그 부인을 도당신으로 모시고 그 넋을 위로하는 도당제를 지내기 이전부터 성황굿이나 여단제 등이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한때는 일제의 문화말살정책(文化抹殺政策)과 식민지민(植民地民)의 뿌리 끊기 음모의 결과로서 혹세무민의 (惑世誣民)의 미신(迷信)으로 몰리기도 하고 더욱 종교적 사대주의에 기인한 박해로 인해서 중단이 되기도 했던 도당굿은 남한산성 축조의 중임을 맡았으나 지정된 기일 안에 성을 쌓지 못하여 억울한 누명을 쓰고 참수가 된 이회장군(李晦將軍)과 그 부인 송씨(宋氏)의 넋을 위로하는 굿이다. 이회장군을 모시고 있는 청량당은 남한산성 내 일장 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의 서편의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도당(都堂)굿은 한 지역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 사후(死後)에 그 지역의 주민들에 의해 인격신(人格神)으로 추앙되어 받들어 지는 성격을 띠고 있는 굿이다. 그러므로 많은 도당의 주신(主神)은 거의가 인신(人神)으로 상징되고 있으며(예 : 안산 군자봉 도당굿은 신라 경순왕인 김부대왕과 부인을 모시며, 태안군 안면읍 황도의 도당은 임경업 장군을 모시고 있는 등 도당은 남이장군, 최영장군, 강감찬장군, 이순신장군 등 지역과 관련이 있는 인물의 신격이 모셔져 있다.) 도당을 섬기는 이유는 동일한 목적을 가진 공동체들에 의해서 형성이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회장군은 조선조 인조 2~4년(1624~1626) 사이에 지세가 험악한 산성 동남쪽의 축조 공사를 맡아했는데 워낙 지형이 험해서 제 날짜에 공사를 마감하지 못하자 장군을 시기하는 간신의 무리들이 장군이 주색잡기에 빠져서 공금을 탕진했기 때문이라는 모함으로 인해 서장대 앞뜰에서 즉결처분으로 참수를 당하게 되었다. 이때 장군은 구차스런 변명을 하지 않고 '내가 죄가 없으면 죽는 순간에 매 한 마리가 날아오리라.

만일 매가 오지 않으면 내 죄가 죽어 마땅하지만, 매가 날아오면 죄가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는데 참형을 당하는 순간 매 한 마리가 날아와 서장대 앞에 있는 바위에 앉아 죽임을 당하는 장군을 바라보고 슬피 울었다고 하여서 그 바위를 매 바위라고 불렀으며 청량당 안에 매 바위의 화분(탱화)을 그려서 장군의 영정 옆에 보관하고 있다. 이회장군은 성의 축조를 완고히 하기 위해서 처첩을 삼남지방으로 보내 축성 비용을 모금케도 하였는데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광주로 돌아오는 길에 장군의 비보를 들은 처첩이 비분을 금치 못하고 송파(松波) 강 머리에 몸을 던져 순절하고 말았다고 하여 당 안에 같이 모셔져 있다.
1920년대에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남한산성 안에는 매당왕신(鷹堂王神)이라는 도당이 있었으며 이는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참수를 당한 홍대감을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남한산 위에 화주당(化主堂)이 있었고 처인 산활부인(山活婦人)은 그 비보를 듣고 뚝섬 교외 한강변의 저자도(楮子島)에서 자살을 했으므로 그곳에 충렬화주당(忠烈化主堂)을 세워서 그 넋을 위로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매가 날아왔다거나 성을 축조할 비용을 주색잡기로 탕진했다는 내용이 서로 일치하고 있어서 남한산성의 도당굿을 조사할 당시에 설문에 응한 사람들이 잘 못 알려준 것으로 보인다. 도당에서 매년 정월 보름 때까지 하는 홍수막이를 홍패대감, 혹은 홍수대감이 막아준다고 했다는 마을 원로들의 고증으로 보아서 당시 홍대감이라는 것은 결국 홍수막이를 해준다는 것을 조사자가 홍대감으로 잘못 전해들은 것임을 알 수 있다.


2. 신위(神位)와 제일(祭日)

남한산성의 도당에는 이회장군과 장군의 성역을 돕다가 남편의 참형소식에 강물에 몸을 던져 순절한 송씨부인과 소당(小堂=첩실) 유씨부인, 벽암대사(碧岩大師), 백마신장(白馬神將), 오방신장(五方神將), 대신(大神)할머니(이 대신할머니는 이회장군의 당을 지키던 나씨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당에 영정을 그려 모셨다고 한다), 남한산성 군웅장군, 별상장군 등 남한산성과 관련이 있는 인물과 무속신을 함께 모시고 있다.

남한산성 도당굿은 송씨부인과 첩실 유씨부인이 물에 빠져 죽은 정월 초이튿날에 청량당의 앞에 있는 수령 350여 년이나 된 향나무 앞에서 주변에 만신(萬神)들에 의해서 의식이 행해지던 것으로 전해진다. 도당굿의 시원(始原)은 이회장군과 부인 송씨, 소실 유씨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 청량당(마을의 주민들은 대감당(大監堂)이라고도 부른다)을 축조하고 그 안에 영정과 신위(神位)를 모신 후에 향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어서 남한산성 도당굿의 역사는 350여 년이 지난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남한산성 대동굿 보존회에 의해 재현이 되어서 매년 8월 28일을 기해 청량당에서 제를 지내고 서낭을 아래로 내려 모신 후 대동굿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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